고통만렙, 온라인 컨퍼런스

예전 자산운용사나 헤지펀드에 있었을 땐, 주식 시장에 상장된 회사들을 주로 봐왔다. 상장된 회사들은 회사의 주요 정보를 외부에 공개해야 하므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상장 기업들의 주요 재무 정보나 뉴스 등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 사이트. 회사 이름이나 Stock Ticker를 입력하면 상장 회사의 각종 공시, 재무정보를 열람 할 수 있다. 공부해서 남 주자. 출처: SEC.gov

하지만, 벤처투자는 전혀 다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은 창업된 지 불과 몇 년 정도 밖에 안된 신생업체로, 매출도 제대로 없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 “상장”이라는 거창한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이들은 회사 주요 정보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아주 식상하게 비유하자면, 일단 상장 업체들은 마치 티파니 같은 금은방(!)에서 볼 수 있는 등급과 세부 정보가 잘 매겨진 다이아반지들과 같다고 보면 된다. 즉, 디자인과 등급 등 이미 주어진 세부 스펙과 정보를 잘 살펴보고 잘 고르기만 하면 장땡이다.

이에 비해 벤처기업들은 일단 뭔가 시커멓고 거칠며 투박한 탄소 돌덩어리를 고르는 것과 같다. 물론 열에 아홉은 이게 다이아몬드인줄 알고 열심히 물주고 키우다가, 엇,, 이 산이 아닌개벼/에이씨, 걍 돌이네 그리고 이내 내다 버린다. 그리고 또 옆에 돌을 들고 아 이건가봐 한다.

어쨌든, 벤처 투자는 이런 다이아몬드 원석에 투자하는 것과 다름 없어서, 산으로 들로 돈싸들고 찾아다녀야 한다. 물론, 유명한 맛집에 사람들이 몰리듯, Top Tier VC에는 제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캤어염 함 봐주시고 사주세요 하는 많은 창업자들이 몰리긴 하지만, 여전히 대박 기회는 필드에 있기 때문에, 열심히 파밍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Top Tier VC firm들. 이런데 파트너 되보고 싶고, 또 이런데서 투자도 받아보고 싶네. 출처: Pitchbook

이게 말이 쉽지, 아무리 통신 인터넷 환경이 발달 했다고 해도 투자자나 창업자 모두 아직도 누가 어디서 뭘하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러한 투자자들과 창업자들을 서로 이어주기 위해 수천 수만의 각종 산업 컨퍼런스와 포럼 등이 매년 이 곳 미국에서 열리고 있다.

다들 한 돗자리에 모여 앉게 해서 네트워킹을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협업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행사의 규모나 참여자들의 면면에 따라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그 중 CES나 MWC 등 대기업도 참여하는 우주대마왕급 컨퍼런스도 있고, 스타트업 중심으로는 SXSW, Startup Grind, TC Disrupt, Money20/20, CbInsights Future of Healthcare 등 매우 유명한 컨퍼런스는 비싼 참가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참가 회사들과 더불어 수준 높은 프로그램 등을 자랑한다.

그립다 CES..가 아니라 라스베가스. 와 근데 사람이 정말 득실득실. 요즘 같은 시대엔 상상도 못할 광경이네. 출처: salesflare.com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 코로나 여파로 극장도 닫는 마당에, 이런 대규모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행사들이 실제로 취소되었고, 연기되었다. 하지만 몇몇 컨퍼런스의 경우엔 코로나 상황에 맞게 100% 온라인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행사 구조를 아예 변경하기도 했다. 상황이 엄중하니, 이렇게라도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들려는 노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TC Disrupt 2020 행사는 100% 온라인 베이스로 진행. 코난쇼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이 키노트 스피커로 참여했다. 출처: techcrunch.com

나도 초반엔 굉장히 의욕적으로 이러한 virtual conference에 참여했다. 출장을 굳이 며칠씩 가지 않더라도 내 집에서 편하게 많은 창업자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 온종일 가만히 앉아서 랩탑 쳐다보고 온라인으로 사람 만나 미팅하는 일도 참 할 짓이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 Zoom Fatigue라는 말도 새로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정전되고 인터넷도 끊어지면 좀 자유로워지게 될까. 앗 그럼 유투브랑 예능은? ㅎ 출처: Bostondigital.com

1:1 미팅은 별 문제 없지만, 내가 컨트롤 하기 어려운 컨퍼런스나 대단위 미팅에서 나의 집중력은 금세 산으로 가버리고 만다. 왜? 일단 다들 개인 랩탑을 기반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인터넷 연결, 카메라, 마이크 등 기술적 문제가 꼭 발생한다. (내 말 들려요? 잘 들려요? 안 들려요? 이것은 보청기 광고인가.)

어찌저찌 미팅 시작. 줄잡아 수십명이 동시 접속한 미팅. 전세계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다. 반갑습니다만, 그중 참으로 특이한 유형의 창업자들 혹은 투자자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한 미팅 세션에 들어와서 주제와 상관없는 온갖 해괴한 종류의 코멘트들, 이를테면,

하나마나한 소리: 코로나 바이러스는 해결 되어야 합니다. (1+1=2 입니다와 뭐가 달라)

노래방 마이크도 아닌데 장시간 붙잡고 아무도 의도를 알아들을 수 없는 질문 남발 (막상 답하면 듣지도 않음)

갑분싸 유발하는, 싸가지없음이 함유된 공격적 언행 (샤크탱크인 줄)

정말,, 그만 끄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마지막으로, 언제든 알트 탭만 누르면 바로 열려 있는 딴짓의 유혹은 그렇게 새콤 달콤할 수가 없다. 갑자기 새로울 것 없는 아마존에 괜히 한번 들어가보고, 괜히 또 한번 핫템 검색을 한다. 유투브 들어간다. 어제 우리 흥민이가, 현진이가, 광현이가 잘 했나 봐주러 간다.

TMI: 여러분 이제 곧 아마존 프라임 데이 입니다. 득템하세요. 출처: amazon.com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게 아니기에 아무래도 현장 분위기나 참여자들의 다양하고 폭넓은 리액션, 반응 등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시장에 존재 하는 수많은 스타트업들을 일일이 쫓고 찾아다니기는 솔직히 어렵다. 그래서 이렇게 돗자리 깔아주고 서로 그 안에 모이게 하는 컨퍼런스가 굉장히 유용했는데, 이놈의 코로나가 이것조차 온라인 비대면 환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러 모로 괴롭고 피곤하다. 다시 만나 악수하고 서로 침 튀겨가며 웃고 싸우며 마주 보고 대화할 날을 기다려본다.